견과류를 맛있게 먹는 방법 중 하나를 소개하겠다. 바로 테이블을 채울 만큼 많은 견과류를 와르르 쏟아놓고 취향껏, 양껏 먹는 것이다. 촤르르르 소리와 함께 캐슈넛이 쏟아진다. 엄마와 함께 먹기에 양이 너무 많았지만 그런 것까지는 생각하지 않았다. 듣기만 해도 기분이 좋아지는 소리와 함께 고소한 향기가 침을 고이게 하고, 눈앞을 가득 채운 듯한 그 모습에 행복할 뿐이었다. 하나를 집어먹어보면 오독오독 씹히는 그 식감과 입안 가득 고소한 맛이 돌아 저절로 미소가 지어진다. 작게 한 줌을 모아 들어 한 입에 대여섯 개를 집어넣으면 꽉 채워진 그 느낌이 알 수 없는 만족감을 주었다. 반으로 툭 쪼개 맨들맨들한 안쪽을 가만히 느끼며 혀를 굴리다 천천히 깨물면 그 식감이 또 그렇게 재미있었다. 엄마도 하나 둘 캐슈..
아직 어렸을 때의 일이다. 열 살? 아니, 그보다는 더 컸었던 것 같다. 어느날 밤 아버지께서 집 밖으로 나가셨다. 어지간하면 늦은 시간에는 잘 나가지 않는 분이라 무슨 일인가 싶어 조금 놀랐었다. 어머니께서 아버지의 친구분이 돌아가셨다고 말씀해 주셨다. 그래서 장례식을 가는 것이라고. 오늘은 아마 거기서 주무시고 오실 거라고 하셨다. 집이라는 공간에 가족의 구성원 중 한 명이 비는 것은 생각보다 무서운 일이었다. 사실 따지고 보면 별거 아닌 일인데 그 때는 그 빈자리가 낯설고 어색했다. 무언가 크게 부족하고 불안정한 느낌이었다. 잠이 잘 오지 않았다. 다음날이 되어서야 아버지는 돌아오셨다. 드디어 빈자리가 채워져 기분이 좋아졌지만 아버지의 얼굴은 편치 않아 보였다. 친한 친구가 떠난 것이니 그 슬픔이 ..
학교 체육관에는 아무도 없다. 텅 빈 공간은 생각보다 공기가 무겁고, 작은 발소리도 너무 크게 돌아온다. 여기서 뭘 하고 있었는지 생각나지는 않지만 슬슬 나갈 때였다. 시골 학교는 생각보다 넓다. 사람이 적은 탓도 있지만, 부지를 넓게 쓸 수 있다는 장점이 있어 건물 사이에 쓸데없는 공간도 많다. 체육관을 나오면 건물로 삼면이 둘러싸인 넓은 공터가 나온다. 왜 이런 공간이 필요한 걸까. 그나마 여기에는 사람이 좀 있었다. 선생님과 친구들 몇 명. “선생님, 저기 뭐가 있어요.” 누가 말한 건지는 모르겠지만 모두의 시선이 거기로 향했다. 꽤 먼 곳에. 정말로 뭔가가 있었다. 사람. 혹은 그와 비슷한 무언가가. “뭐지? 선생님이 보고 올게.” 다들 어떻게 해야 할까 고민하는데 선생님이 대표로 나섰다. “근데..
얼마 전, C에게 들은 이야기이다. 평소 운동을 많이 해서 겉으로 몸이 좋은 것이 티나는 친구였는데, 야간 편의점 아르바이트를 하면서도 어지간히 취한 손님이 아니면 시비 걸리는 일이 별로 없을 정도였다. 그러다보니 야간 아르바이트를 하면서도 언제나 당당했고, 무서움을 모르고 다녔다. C가 일하는 편의점은 사거리에 있었는데 좀 오래된 건물이라 화장실이 없다는 문제가 있었다. 화장실을 가려면 편의점을 나와 조금 떨어진 노래방 건물을 가야 했는데 이상하게 사장님에게 받은 열쇠가 맞지 않았다고 한다. 별 수 없이 참았다가 집에 가서 해결하고는 했는데, 정 급할 때는 길 건너 맞은 편에 있는 빵집에 가서 화장실을 빌려야 하는 상황이었다. 하루는 정말 참기가 힘들어서 빵집을 찾아갔다. 그런데 이 빵집도 오래된 건물..
어디서부터, 언제부터 라고 것도 없이 우리는 좀비들을 피해 도망 다니고 있었다. 이 미친 상황은 다른 생각도 할 수 없이, 일단 도망치고 살아남는 것만 생각하게 만든다. 여기를 봐도, 저기를 봐도 썩어가는 인간들 이빨을 드러내며 다가오고 있다. 코가 썩을 것 같은 냄새는 익숙해지지도, 적응되지도 않은 채 이미 내가 좀비가 된 것은 아닌가 착각하게 만든다. "젠장! 이쪽으로!" "어디로 간다는 거야?!" "몰라! 일단 저 새끼들이 적은 쪽으로!" 어디로 가는 건지도, 어떻게 돌아가는 지도 모르고 그저 뛰고, 피하고, 굴렀다. 주변에서 고함과 울부짖는 소리가 들리고, 누군가 우는소리, 비명, 무언가 부서지는...... 물기 많은 무언가가 터지고, 깨지는 소리...... 숨이 막힌다. 난 이미 죽은 것 아닐까..
초여름의 초저녁. 아직은 아주 뜨겁지 않아 창문을 열어두기만 해도 제법 선선했다. 바람이 조금 부는 밖의 풍경은...... 글쎄... 조금은 평소와 다른 느낌이다. 제법 높은 층 아파트라서 그런 것인지, 아니면 여름이라 그런 건지 이렇게 밖을 내다보고 있으면 기분이 묘하다. 왜 이렇게 밖의 모습에 집중하는지, 왜 이 풍경을 어머니와 함께 보고 있는지, 왜 함께 술을 하고 있는지는 잘 모르겠다. 술기운이 오른 것일까? 확실히 그런 거 같다. 원근이 무너지고, 경계선이 흐트러지는 듯한 풍경에 손을 내밀면 푹하고 손이 파고들 것 같다. 어머니의 모습이 어느 순간 안 보였다. 어디로 가신 것일까 싶었는데 술병을 가지고 오시는 것이 보였다. 아마 술이 좀 부족하셨나 보다. 투명하고 큰 위스키 병. 우리 집에 저런..
군대 선임 A가 들려준 이야기입니다. 그날 A 선임은 야간 근무를 위해 산꼭대기 초소로 이동 중이었습니다. 꽤나 험한 산이고 초소까지 가는 산길은 외길이라 밤에는 제법 으스스한 분위기입니다. 거기에 올라가다 보면 초입쯤에 이제 사용하지 않는 버려진 초소가 하나 더 있어서 괜히 더 무서운 분위기를 만듭니다. 6.25 때 쓰는 초소라는 소문이 있었지만 지금은 그냥 폐가와 다르지 않은 곳입니다. 그날도 묘하게 꺼림칙한 분위기에 A 선임은 서둘러 산길을 오르고 있었습니다. 원래대로라면 A 선임은 산 위 초소에 가서 B 선임과 교대를 해야 합니다. 그리고 B 선임은 내려가서 복귀를 하면 되는 겁니다. 그런데 엉뚱하게 초입에 있는 버려진 초소에서 B 선임이 부르는 소리가 나는 겁니다. "야, A!" "일병 A!" ..
나는 겉도는 아이다. 반 친구들과 잘 섞이지 못하고, 내가 피하든 상대가 피하든 혼자일 때가 많은 아이다. 아마 내가 피하는 것보다는 다른 애들이 피할 때가 많을 거다. 초등학생이라도 그 정도는 안다. 나는 섞이기 힘든 아이고, 저 친구들은 내가 잘 모르는 아이들이다. 왜 그런 말을 하는지, 왜 그런 행동을 하는지 이해하기 힘든 아이들. 그래서 조금 무서운 것도 같다. 어느 날 한 아이의 집에서 큰 파티를 연다고 한다. 왜 거기에 끼게 되었는지는 잘 모르겠다. 가지 않을 이유도 딱히 없어서......가 이유라면 이유겠지. 장소는 큰 강당 같은 파티장. 넓고 큰 강당에 넓고 큰 장식과 넓고 큰 테이블...... 너무 크게 느껴지는 그것들은 마치 하나의 미로 같아 보였다. 그래서 이 파티장은 초등학생들이 놀..
2021년 6월 16일. 오늘 경험한 사소하지만 괴이한 일을 기록한다. 업무 때문에 서울 송파의 모 지역의 빌라를 찾아갔다. 시간은 저녁 8시를 넘긴 시간. 서울이긴 하지만 골목 안쪽이라 인적은 드물다. 찾아간 집은 5층 맨 꼭대기. 꽤나 낡은 건물이라 엘리베이터도 없었다. 계단도 조금 낮고, 천장도 낮은 편이라 올라가는 내내 압박감이 있다. 5층에 도달하여 501호의 초인종을 눌렀다. '띵동'하는 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렸다. [드극...... 치익... 취아아아... 카극..... 카그그그그.......] 초인종이 울리고 조금 있다가 인터폰으로 울리는 소리. 수화기를 드는 듯한 소리에서 이어지는 잡음들. [크극..... 카그그극...... 취기익....... 키이이이이.......] 오래된 스피커 특유..
상태가 안 좋다. 구체적으로 어디가 안 좋냐고 하면 할 말이 없다. 아무래도 정신적 문제는 겉으로 잘 드러나지 않고, 정작 나 역시 어떤 상태인지 혼란스러우니까. 그저 정상이 아니라는 것만은 분명 알 수 있었다. 정신과...... 정신병원을 가야 한다. 아마도 분명...... 정신병원으로 알고 도착한 곳은 예상과 조금 다른 곳이었다. 병원이라기보다는 유치원에 더 가까운 모습. 혹시 아동전문인 걸까? 다행히 그런 것은 아닌 모양이다. 어찌어찌 물어물어 8층의 직장인 대상 상담실을 안내받을 수 있었다. "어떻게 오셨나요?" "어, 상담이 좀 필요해서요." "어떤 문제가 있으시죠?" "네? 그건 정확히 모르겠는데......" "여기는 처음 오시나요?" "네, 당연히 처음......" "저를 보는 것도 처음이시..
좀처럼 잠들기 어려운 밤이다. 잘 때다 지났지만 이상하게 정신이 또렷하다. 처음 있는 일은 아니지만 오늘은 정도가 조금 심했다. 일부러 눈을 감고 열심히 잠을 청해보았지만 소용없었다. 결국 한참을 뒤척이다 옆으로 돌아누운 채 눈을 뜨고 말았다. "흡!" 정신을 차렸을 때는 식은땀을 흘리며 천장을 보고 있었다. 뭐였을까. 분명 사람 같았는데...... 방에 있을 리 없는 낯선 사람. 명암이 확실하지 않은, 색이 느껴지지 않는 사람. 그리고 그 커다란 눈. 귀신이라도 본 걸까? 아마 잠이 안 온다고 뒤척이나 어느 순간 잠이 들고, 악몽을 꾼 모양이다. "후우......" 겨우 잠들었는데 악몽 때문에 깨다니...... 아쉬운 일이다. 바로 저기에 귀신이...... "허읏!" 어느새 또 천장이 보인다. 뭐였지?..
오늘은 다른 학교 친구를 보러 그 학교로 놀러 갔다. 자주 볼 수 있는 친구는 아니라 그런지 아니면 다른 학교가 낯설어서 그런지 조금 이상한 기분이다. 음, 전자보다는 후자의 이유가 더 맞는 것 같다. 그 학교는 멋있는 걸로 꽤 유명하니까. 통유리로 된 외관에 한 번 놀라고, 박물관 같은 내부 인테리어에 또 한 번 놀라고, 전시회처럼 걸린 그림들이 너무 멋져서 또 놀랐다. 정말 유명할만한 학교다. "야, 저기도 뭐 있다!" "뭐야? 와! 이건 어떻게 그린 거지?" 여고생들에게 새롭고 흥미로운 게 가능한 장소만큼 멋진 게 또 있을까. 한참을 꺄꺄 소리를 지르며 뛰었더니 결국 친구가 한 마디 했다. "야! 니들은 나 보러 온 거냐? 학교 놀러 온 거냐?" "당연히 너네 학교 놀러 왔지!" "야 이 씨!" 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