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룸촌 근처 편의점에서 일하다 보면 정말 온갖 사람들을 다 볼 수 있다. 생각보다 진상은 적지만 그냥 눈에 보이는 것만으로도 힘들게 하는 사람들이 잔뜩 있는 게 원룸촌이다. 속옷 위에 대충 롱 패딩만 걸치고 오는 손님. 사는 것도 없으면서 기웃기웃 매장 안을 살피기만 10분 이상 하는 손님. 꼭 식사시간에 와서 사람 쉬지 못하게 하고 라면 냄새 풍기는 손님. 매장 문 앞에서 담배 피는 손님. 일반 쓰레기와 재활용 쓰레기를 꼭 반대로 버리는 손님. 등등. 항상 고정적으로 보이는 사람들이 고정적으로 사람을 힘들게 한다. 그래도 역 앞이나 술집 근처, 아파트 단지 근처 편의점의 사연을 들어보면 그것보다는 낫다 싶긴 하다. 워낙 오는 손님만 오다 보니 대충 뭘 살지, 뭘 할지 예상이 되는 것도 좋은 점이다. 그..
견과류를 맛있게 먹는 방법 중 하나를 소개하겠다. 바로 테이블을 채울 만큼 많은 견과류를 와르르 쏟아놓고 취향껏, 양껏 먹는 것이다. 촤르르르 소리와 함께 캐슈넛이 쏟아진다. 엄마와 함께 먹기에 양이 너무 많았지만 그런 것까지는 생각하지 않았다. 듣기만 해도 기분이 좋아지는 소리와 함께 고소한 향기가 침을 고이게 하고, 눈앞을 가득 채운 듯한 그 모습에 행복할 뿐이었다. 하나를 집어먹어보면 오독오독 씹히는 그 식감과 입안 가득 고소한 맛이 돌아 저절로 미소가 지어진다. 작게 한 줌을 모아 들어 한 입에 대여섯 개를 집어넣으면 꽉 채워진 그 느낌이 알 수 없는 만족감을 주었다. 반으로 툭 쪼개 맨들맨들한 안쪽을 가만히 느끼며 혀를 굴리다 천천히 깨물면 그 식감이 또 그렇게 재미있었다. 엄마도 하나 둘 캐슈..
비가 많이 오던 어느 여름 장마 때의 이야기다. 지금은 흙바닥 놀이터가 별로 없지만 어릴 때만 해도 놀이터는 당연하다는 듯이 흙바닥, 모래바닥이었다. 아이들이 헤집으며 노는 놀이터에는 비가 오면 여기저기 물웅덩이가 생긴다. 물웅덩이가 생기면 또 그 물을 가지고 놀고, 물을 흘러가게 하면서 놀고, 흙을 매우면서 놀았다. 비가 많이 온 다음 날이었다. 놀이터에는 전에 없이 큰 물웅덩이가 생겨 있었고, 이미 많은 아이들이 모여 그 물을 가지고 놀고 있었다. 지금까지는 기껏해야 아이들 손으로 두 뼘, 깊이도 손등이나 겨우 잠기려나 싶은 물웅덩이뿐이었다. 그런데 지금 욕조처럼 넓고 손목이 다 잠길만한 물웅덩이가 생긴 것이다. 아이들은 환호하며 이 작은 호수를 꾸미고 놀았다. 한참을 놀다 누가 먼저 시작했는지 주변..
세상의 어딘가에서는 사람들이 알지 못하는 사이 외계 생명체들이 침입하고 있다. 그 외계 생명체들은 크고 잔인하고 폭력적이며 어지간한 도시를 초토화 시킬 만큼의 힘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 사실을 모르고 살아간다. 극소수의 일부만 그것을 알고 대비할 뿐이다. 그리고 마법소녀 리-제네레이션도 그중 일부다. 아니 일부였다. 지구에는 많은 히어로들이 존재하고 각자 다양한 개성의 능력을 가지고 있다. 몸에서 불을 뿜거나 물이 될 수 있거나 순간이동을 하거나 하는 등의 능력들이다. 그중에는 외계 생명체와 싸울 수 있는 능력도 있지만 그렇지 않은 것도 있다. 소녀의 능력은 후자였다. 마녀의 힘을 계승한 소녀가 가진 힘은 재생이었다. 어떤 상처를 입어도 순식간에 나아버렸다. 아니 상처가 낫는 정도가..
바람개비는 간단하게 만들 수 있는 장난감이다. 가위로 종이를 오려 붙이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재주가 좋은 아이들은 몇 장의 종이를 접어 가위질도 없이 커다란 바람개비를 만들기도 한다. 하지만 이 아이에게는 그런 재주가 없었다. 종이를 오리는 것도, 접는 것도 모두 어려운 일이다. 그래서 구경만 할 수밖에 없었다. 몇몇 아이들이 새로운 바람개비를 들고 와 놀았다. 색색의 색종이들이 빙글빙글 돌며 햇빛에 반짝거렸다. 한가로운 바람에, 달리는 아이들의 서슬에, 인내심 부족한 아이의 날숨에 바람개비가 돌아간다. 날씨는 맑고, 주변에 시끄러운 것은 아무것도 없는 논둑길 어딘가. 심심했던 아이들이 변덕스럽게 만든 바람개비를 들고 나와 노는 모습을 아이는 그저 구경만 하고 있었다. 아무것도 들지 않은 빈손을 들어 ..
그림자가 숨 가쁘게 움직였다. 아이는 이미 몇 번이나 그림자 연극을 봤지만 매번 가슴 졸이며 긴장했다. 지금 보는 장면은 괴물이 도망치는 주인공을 쫓아가는 부분이다. 비명을 지르며 도망치는 주인공은 넘어지기도 하고, 기기도 하면서 괴물로부터 멀어지기 위해 애쓴다. 괴물은 천천히 걸음을 옮긴다. 하지만 한 번에 크게 크게 움직이기 때문에 주인공은 도망치지 못한다. 지친 주인공이 빨리 달리지 못해서 그런 것이기도 하다. 아이는 다음 순서를 알고 있었다. 막다른 골목에 다다른 주인공이 다급하게 주변을 두드리고 도움을 청하다 뒤돌아 괴물을 마주 보는 장면이다. 그림자뿐이지만 주인공의 절망과 공포가 아주 잘 느껴졌다. 얼굴 표정이 세세하게 나타나지 않아도 그 목소리와 대사만으로도 충분했다. 아이는 바짝 얼어붙은 ..
안개고래 안개고래는 안개를 몰고 다니는 괴이다. 그 자신도 거대한 안개 덩어리기 때문에 그 실체를 정확히 보기는 매우 어렵다. 그저 갑자기 안개가 자욱해지고 그 안에서도 무언가 느낌이 다른, 무거운 느낌의 안개 속으로 들어서면 안개고래의 몸속으로 들어왔구나 하고 생각할 뿐이다. 이름처럼 고래와 유사한 형태와 크기를 가지고 있는데 주로 바다 위를 떠다닌다. 워낙 커서 한눈에 다 담기는 쉽지 않지만 바닷가 근처 산 위에서 보면 대략적인 형태를 볼 수 있다. 물론 안개를 두르고 있어 안개고래 자체를 볼 수는 없고 안개가 짙고 옅음을 통해 윤곽을 확인할 뿐이다. 안개고래는 특별히 해를 끼치거나 악의를 가진 괴이는 아니다. 그저 안개를 몰고 다닐 뿐이다. 하지만 짙은 안개로 인해 배가 길을 잃게 되거나 사고가 유..
아지랑이 숙녀 아지랑이 숙녀는 연기 여인, 신기루 소녀 등이라 불리기도 한다. 짙은 그늘이나 땅거미 진 공터, 안개 아래 등을 배회하는 것이 보통이지만 간혹 밝은 곳에서 목격되기도 한다. 어떤 조건에 의해 그렇게 되는지는 밝혀지지 않았다. 언제나 어둠 속에 몸을 숨기고 있기 때문에 그 실체를 정확히 본 사람은 없다. 다만 목격담을 모아보면 어두운 곳에서 연기가 피어오르는 것처럼 허연 것이 날리며 솟아오르더니 거뭇한 무언가가 몸을 일으키고 이쪽을 바라보았다고 한다. 머리카락인지 옷인지 모를 것을 몸에 걸쳐 정확하지는 않으나 그 윤곽은 분명 여성의 것이라는 게 공통된 진술이다. 아지랑이 숙녀는 특별히 해를 끼치거나 악의 어린 장난을 치는 괴이는 아니다. 하지만 그 존재 자체가 사람의 시선을 어지럽히는 면이 ..
아직 어렸을 때의 일이다. 열 살? 아니, 그보다는 더 컸었던 것 같다. 어느날 밤 아버지께서 집 밖으로 나가셨다. 어지간하면 늦은 시간에는 잘 나가지 않는 분이라 무슨 일인가 싶어 조금 놀랐었다. 어머니께서 아버지의 친구분이 돌아가셨다고 말씀해 주셨다. 그래서 장례식을 가는 것이라고. 오늘은 아마 거기서 주무시고 오실 거라고 하셨다. 집이라는 공간에 가족의 구성원 중 한 명이 비는 것은 생각보다 무서운 일이었다. 사실 따지고 보면 별거 아닌 일인데 그 때는 그 빈자리가 낯설고 어색했다. 무언가 크게 부족하고 불안정한 느낌이었다. 잠이 잘 오지 않았다. 다음날이 되어서야 아버지는 돌아오셨다. 드디어 빈자리가 채워져 기분이 좋아졌지만 아버지의 얼굴은 편치 않아 보였다. 친한 친구가 떠난 것이니 그 슬픔이 ..
[띵동] 시간이 충분했기에 여유롭게 초인종을 눌렀지만 문은 열리지 않았다. [띵동띵동] 몇 번이나 초인종을 눌렀지만 대꾸도 없었다. 이상한 일이다. 분명 집에 있을 텐데? 보통은 2, 3번만 초인종을 눌러도 나올 텐데…… 불안했다. 혹시 무슨 일이 있는 것은 아닐까? 이렇게 밖에 서 있어도 되는 걸까? 지금이라도 뭔가 해야 하는 것 아닐까? 손바닥에 땀이 차고 호흡이 불안정해질 때쯤 누군가 부르는 소리가 났다. “거기서 뭐 해요?” “응?” 아내였다. 아내가 옆집에서 문을 열고 나와서 황당하다는 듯이 이쪽을 보고 있었다. “아니, 여기……” “바보 같기는… 그 집이 아니잖아요.” 그제서야 생각이 났다. 얼마 전에 이 집에 들어온 후 주변 집들을 하나씩 방문 중이다. 그리고 어제는 옆집에도 방문했었다. 민..
흙냄새가 났다. 술에 취한 탓에 착각을 한 것인지 아니면 아직 잠이 덜 깨서 꿈속을 헤매는 건지 몰라도 어릴 때 맡던 그 냄새가 났다. 시골 사는 사람에게 흙냄새는 공기의 냄새와 다르지 않다. 새벽같이 밖으로 나서면 눅눅하게 물기를 먹은 흙냄새가 코 끝을 스치고, 밭이든 논이든 가기만 하면 풀 냄새 섞인 흙냄새가 다가온다. 한발 내딛으면 흙이고, 물러서도 흙이니 오히려 흙냄새를 잘 몰랐다. 흙냄새가 그렇게 강하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은 서울에 온 후였다. 정확히는 서울 생활을 하다 다시 시골을 갔을 때였다. 그전까지는 몰랐던 흙냄새가 아주 강하게 느껴졌다. 그런데 그 냄새가 슬며시 코를 간질였다. 지금은 날 리 없는 그런 냄새였다. 아마도 꿈속에서 시골이라도 다녀온 걸까 싶었다. “어? 일어났냐?” 함께 ..
전 세계에서 단 사람에게 한 가지 소원을 이룰 수 있는 기회가 있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아마도 모두가 자신의 소원을 빌기 위해 아우성칠 거다. 어쩌면 그 과정에서 누군가 다치거나, 심하면 죽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막상 그런 상황이 되고 보니 생각보다 상황은 나쁘지 않았다. 사람들은 다들 자신의 소원을 빌고 싶었지만 그 욕심만큼이나 서로를 겨눈 무기가 두려웠기 때문이다. 세계 정상들이 회의를 하고 또 한 끝에 소원을 빌 수 있는 권한을 만 10세 이하 아이 중에 추첨하여 주기로 했다. 아직 어린아이들이 비는 소원은 그나마 어른들의 욕망에 비해 안전할 거라는 판단이었다. 물론 만 10세의 기준을 어떻게 할 것이냐에 대해 논란이 있기는 했지만 그 역시 어렵지 않게 타협했다. 각자의 출생신고일을 기준으로 삼고..
기억이 확실하지 않아. 다만 정신을 차렸을 때 좁은 공간에 갇혀 있었다는 것은 확실해. 그럭저럭 몸을 움직일 수는 있었지만 그다지 넉넉하지 않은 공간이었지. 다른 특징으로는…… 사방이 온통 붉은색이었어. 좁고, 온통 붉기만 한 공간은 오래 머물기에 쾌적한 곳은 아니지. 왜 갇혀 있는지도 모르고 누가 오지도 않는 상태에서 가만히 있는 것은 바보 같은 일이기도 하고 말이야. 그러니 별 수 있어? 탈출해야지. 그나마 팔다리 움직일 정도 공간은 있어서 손에 잡히는 대로 잡아당겼어. 손톱으로 긁어도 보고, 하다 안 돼서 물어뜯기도 했지. 그나마 물어뜯는게 정답이었는지 조금씩 틈이 생기더라. 틈으로 손가락을 비집어 넣고 쥐어뜯고 또 물고…… 겨우겨우 탈출했단 말이야. 그랬더니 밖에 사람이 잔뜩 있는 거야! 너무 하..
학교 체육관에는 아무도 없다. 텅 빈 공간은 생각보다 공기가 무겁고, 작은 발소리도 너무 크게 돌아온다. 여기서 뭘 하고 있었는지 생각나지는 않지만 슬슬 나갈 때였다. 시골 학교는 생각보다 넓다. 사람이 적은 탓도 있지만, 부지를 넓게 쓸 수 있다는 장점이 있어 건물 사이에 쓸데없는 공간도 많다. 체육관을 나오면 건물로 삼면이 둘러싸인 넓은 공터가 나온다. 왜 이런 공간이 필요한 걸까. 그나마 여기에는 사람이 좀 있었다. 선생님과 친구들 몇 명. “선생님, 저기 뭐가 있어요.” 누가 말한 건지는 모르겠지만 모두의 시선이 거기로 향했다. 꽤 먼 곳에. 정말로 뭔가가 있었다. 사람. 혹은 그와 비슷한 무언가가. “뭐지? 선생님이 보고 올게.” 다들 어떻게 해야 할까 고민하는데 선생님이 대표로 나섰다. “근데..
얼마 전, C에게 들은 이야기이다. 평소 운동을 많이 해서 겉으로 몸이 좋은 것이 티나는 친구였는데, 야간 편의점 아르바이트를 하면서도 어지간히 취한 손님이 아니면 시비 걸리는 일이 별로 없을 정도였다. 그러다보니 야간 아르바이트를 하면서도 언제나 당당했고, 무서움을 모르고 다녔다. C가 일하는 편의점은 사거리에 있었는데 좀 오래된 건물이라 화장실이 없다는 문제가 있었다. 화장실을 가려면 편의점을 나와 조금 떨어진 노래방 건물을 가야 했는데 이상하게 사장님에게 받은 열쇠가 맞지 않았다고 한다. 별 수 없이 참았다가 집에 가서 해결하고는 했는데, 정 급할 때는 길 건너 맞은 편에 있는 빵집에 가서 화장실을 빌려야 하는 상황이었다. 하루는 정말 참기가 힘들어서 빵집을 찾아갔다. 그런데 이 빵집도 오래된 건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