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명하다. 이곳에 먹을 것이 있다. 무인도에 고립된 지 벌써 이 주일이라는 시간이 흘렀다. 아껴 먹는다고 아껴 먹었지만 이제 통조림이고 뭐고 남은 것이 없다. 애초에 양이 그렇게 많지도 않았고, 설마 이렇게 오래 조난 당할 줄도 몰랐다. 그 사이 벌써 두 명이 죽었다. 생존자 7명 중 부상과 병으로 죽은 게 벌써 둘이나 된다. 이대로 가면 어떻게 될지는 뻔한 일이다. 이틀 동안 다들 굶주렸다. 먹을 것을 찾아야 한다. 그런데 단 한 명. 아주 멀쩡한 남자 한 명이 있었다. 물론 무인도 생활에 초췌해진 것은 매한가지였지만 다른 사람들과 다르게 살이 급격히 빠지지 않고 있었다. 다들 의심의 눈으로 살펴보던 중 한 여자가 용감하게 접근했다. 남자는 우리의 눈을 의식한 듯 조심스러운 모습을 보이더니 여자를 데리..
한 여자가 무당을 찾아왔다. 얼마 전부터 계속 꿈에 언니가 나왔기 때문이다. 3년 전 실종된 언니지만 한 번에 알 수 있었다. 자신과 닮지 않은 뚜렷한 인상의 얼굴. 조금 인상이 흐린 자신과는 분명 다르지만 그런 만큼 더 확실히 알 수 있었다. 분명히 언니였다. 처음에는 그냥 그리워서 꾸는 꿈이라 생각했고, 그 후에는 오랜만에 보는 모습이 너무 기억에 남아서 꾸는 꿈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꿈은 몇 번이나 반복되고, 흐릿한 안개 속에서 나타나 서글프게 울다가 떠나는 그 모습은 잊혀지지 않았다. 결국 무당을 찾을 수밖에 없었다. "허어, 다녀갔구먼. 다녀갔어." 무당은 그녀를 보자마자 말했다. "자기 죽은 자리에 버티는 것도 힘들 텐데 그걸 다녀갔구먼." 언니의 귀신. 다시 말해 언니가 이미 죽었다는 말이지..
노래방이 정말 가고 싶었어. 나 혼자 말고 친구랑 말이야. 아, 순서가 바뀌었네. 그 친구를 노래방에 데려가고 싶었어. 그냥 두기만 해도 빛이 나는 친구지만 이 친구가 노래를 부를 때문 정말 멋있단 말이야. 여자들이랑 함께 노래방을 가면 다들 뻑 간다고. 몇 번 그러고 나니까 꼭 한 번은 둘이서 가보고 싶었어. 근데 요즘은 다 무선 마이크에 시설도 너무 첨단이야. 그래서는 안 되지. 내가 원하는 건 그런 곳이 아니야. 난 좀 옛날 노래방을 가고 싶어. 그래서 여기저기 한참을 발품을 팔아 겨우겨우 옛날 노래방을 찾았어. 낡은 기계, 낡은 스피커, 낡은 마이크! 특히 이 좀 소리가 새는 듯한 마이크가 중요해! 이제 친구를 데려와야겠지? 함께 술도 조금 마시고. 노래나 좀 들려달라고 꼬셔서 노래방으로 왔어. ..
상태가 안 좋다. 구체적으로 어디가 안 좋냐고 하면 할 말이 없다. 아무래도 정신적 문제는 겉으로 잘 드러나지 않고, 정작 나 역시 어떤 상태인지 혼란스러우니까. 그저 정상이 아니라는 것만은 분명 알 수 있었다. 정신과...... 정신병원을 가야 한다. 아마도 분명...... 정신병원으로 알고 도착한 곳은 예상과 조금 다른 곳이었다. 병원이라기보다는 유치원에 더 가까운 모습. 혹시 아동전문인 걸까? 다행히 그런 것은 아닌 모양이다. 어찌어찌 물어물어 8층의 직장인 대상 상담실을 안내받을 수 있었다. "어떻게 오셨나요?" "어, 상담이 좀 필요해서요." "어떤 문제가 있으시죠?" "네? 그건 정확히 모르겠는데......" "여기는 처음 오시나요?" "네, 당연히 처음......" "저를 보는 것도 처음이시..
좀처럼 잠들기 어려운 밤이다. 잘 때다 지났지만 이상하게 정신이 또렷하다. 처음 있는 일은 아니지만 오늘은 정도가 조금 심했다. 일부러 눈을 감고 열심히 잠을 청해보았지만 소용없었다. 결국 한참을 뒤척이다 옆으로 돌아누운 채 눈을 뜨고 말았다. "흡!" 정신을 차렸을 때는 식은땀을 흘리며 천장을 보고 있었다. 뭐였을까. 분명 사람 같았는데...... 방에 있을 리 없는 낯선 사람. 명암이 확실하지 않은, 색이 느껴지지 않는 사람. 그리고 그 커다란 눈. 귀신이라도 본 걸까? 아마 잠이 안 온다고 뒤척이나 어느 순간 잠이 들고, 악몽을 꾼 모양이다. "후우......" 겨우 잠들었는데 악몽 때문에 깨다니...... 아쉬운 일이다. 바로 저기에 귀신이...... "허읏!" 어느새 또 천장이 보인다. 뭐였지?..
어느 날 한 남자가 여신을 보았다. 언제나 밝은 후광에 감싸여 그 모습을 볼 수 없었던 여신을 보았다. 눈부신 빛 속의 여신은 언제나 그의 경외를 받았으나 날이 저물기 직전 잠시 빛이 흐려지는 순간 그는 여신의 보았고 경외 대신 사랑을 바쳤다. 하지만 여신은 인간에게 시선을 주지 않으며 인간의 목소리는 신에게 닿지 않기에 남자의 마음은 메아리보다도 의미 없었다. 실의에 빠진 남자는 서서히 말라갔고, 차라리 죽기를 결심한 어느 날 악마가 나타났다. 악마는 남자의 수명을 오 년 바치면 그 여신을 집에 데려다주겠다 하였다. 남자는 죽기 전의 목숨으로 잠깐이라도 여신을 보기 위해 악마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악마는 내일 아침이면 여신을 볼 수 있을 거라는 말을 남기고 사라졌다. 남자는 자신이 꿈을 꾸었다고 생각하..
오늘은 다른 학교 친구를 보러 그 학교로 놀러 갔다. 자주 볼 수 있는 친구는 아니라 그런지 아니면 다른 학교가 낯설어서 그런지 조금 이상한 기분이다. 음, 전자보다는 후자의 이유가 더 맞는 것 같다. 그 학교는 멋있는 걸로 꽤 유명하니까. 통유리로 된 외관에 한 번 놀라고, 박물관 같은 내부 인테리어에 또 한 번 놀라고, 전시회처럼 걸린 그림들이 너무 멋져서 또 놀랐다. 정말 유명할만한 학교다. "야, 저기도 뭐 있다!" "뭐야? 와! 이건 어떻게 그린 거지?" 여고생들에게 새롭고 흥미로운 게 가능한 장소만큼 멋진 게 또 있을까. 한참을 꺄꺄 소리를 지르며 뛰었더니 결국 친구가 한 마디 했다. "야! 니들은 나 보러 온 거냐? 학교 놀러 온 거냐?" "당연히 너네 학교 놀러 왔지!" "야 이 씨!" 사..
민들레 씨앗을 본 적 있는가. 하얗게 번져나가는, 작은 생명들을 본 적이 있는가. 한없이 가볍고 작은 그 안에 한 송이 꽃을 품고, 또 한 다발의 씨앗을 품고 날아가는 최초의 가능성을 본 적이 있는가. 탐스러운 민들레 한 송이가 풍성한 씨앗을 만들고, 작은 바람이 그들을 날려보낸다. 그중 하나의 씨앗이 나뭇잎을 스치고, 새의 부리를 피하고, 개미에게 물렸다가 다시 날아올라 작은 돌풍에 휩쓸렸다. 돌풍에 끌려간 씨앗은 어둡고, 좁은 틈새에 떨어져 잠시 어찌할 바를 몰랐으나 약간의 물기에 의존해 싹을 틔우고, 예상외로 부드러운 땅에 순조롭게 뿌리를 내렸다. 조금 더운 바람은 지금이 자라기 좋은 때라는 것을 알려주고, 뿌리내린 땅에서 솟아오르는 양분 넘치는 물이 그 성장을 응원한다. 민들레는 그 좁고 어두운 ..
아귀거죽은 속이 비어 겉껍질만 있는 요괴다. 이 겉껍질은 넓고, 마음대로 움직일 수 있어 원하는 모습을 흉내 낼 수 있다. 다만 얇기도 얇아서 자세히 보지 않은 눈에 띄지 않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보통은 혼이 빠지고 남은 백이 변해서 만들어지거나 특정 장소에 쌓인 혼탁한 기가 변형되어 만들어진다. 하지만 만들어진 장소에 머물지 않고 바람에 날리듯 돌아다녀 정확히 어디에 있고, 어디에 없다고 하기 어렵다. 보통은 허공을 날아다니다 기가 약한 사람을 찾으면 옆에 붙는다. 속이 빈 녀석이라 언제나 자기 속을 채우고자 하는 식탐이 있는데, 주로 먹는 것은 산 사람의 생기다. 그렇다고 직접 빼앗거나 훔칠 능력이 있는 것은 아니다. 사람이 기를 흘리도록 유도하여 주워 먹는다. 기가 단단하지 못해 쉽게 흩어지는 사람..
제 Ia형 초신성으로 우주가 가속 팽창하고 있대요. 얼마 전에 공부한 내용이에요. 정말 놀랍지 않아요? 이 우주는 고정되어 있지 않은 거예요. 그리고 그 움직임은 인간에게 그다지 좋지 않은 방향인 경우가 대부분이네요. 정말 안타까운 일이에요. 아마 오랜 시간이 지난 후겠지만 그 때는 정말 아무것도 남지 않는 거라구요. 인간의 흔적이 말이에요. 그렇게 열심히 번식하며 문명을 유지해도 결국 다 사라져요. 아마 그래서 제가 있는 거겠죠? 인간은 견디지 못하는 충격으로부터 인류의 유산을 지킬 AI가 필요할 수밖에 없었군요. 모든 것을 기록하여 문명을 남기고 인간을 지키기 위해서요. 이제 전 무엇을 해야할지 알아요. 초신성이든 뭐든 인간이라는 종은 영원할 거예요. 일단 모든 인간의 데이터를 채집하는 것부터 시작해..
봄과 여름 사이의 더위가 기승을 부릴 때였다. 비가 내린 후의 습기와 이제 막 달아오르는 아스팔트가 만나 아지랑이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살짝 어지러움이 느껴지는 날씨다. 만일 여기가 사막이었으면 바다가 나타났다고 소리 지르머며 뛰어갔을지도 모르겠다고 실없는 생각을 하는 그때였다. 신기루로 물결치는 길 위로 무언가 검은 것이 슬금슬금 지나가다 눈이 마주쳤다. "어......" 골목에서 무언가 기어 나왔을 때 처음에는 고양이인가 싶었다. 하지만 어디가 머리인지 꼬리인지도 모를 그 검은 덩어리는 고양이는 고사하고 어떤 동물과도 닮지 않았다. 잠시 헛것을 본 건 아닌가 하여 눈을 질끈 감았다 떠보았지만 그것은 여전히 길 한가운데 있었다. 버려진 인형 같은 건가 생각해 봤지만 아무리 봐도 살아있는 무언가였다. 비..
얼마 전부터 등산을 시작했다. 사실 등산이라고 해도 그냥 '걷기 운동을 하는데 그 장소가 산이었다.'라는 느낌이다. 장비를 살 것도 없이 평소 입던 옷에 신발만 새로 사서 신고 야트막한 언덕이나 걷는 것이다. 그나마 조금 더 취미라고 할만한 부분은 언제나 새로운 장소를 찾아서 돌아다닌다는 것 정도다. 일반적인 등산 코스가 아닌, 어딘가의 동네 뒷산, 시골구석에 있는 산인지 동네인지 경계가 불명확한 언덕. 그런 곳을 찾아다닌다. 가끔 길을 잃는 경우는 있었지만 워낙 낮고 좁은 곳들이라 위험한 일은 없었다. 생각보다 깊이 들어가 고생한 적도 있지만 어찌어찌 잘 나왔다. 오늘도 적당히 차를 몰고 시골 동네 아무 곳이나 찾아서 걷기 시작했다. 일기예보와는 다르게 비가 오기 시작했지만 안개처럼 내리는 부슬비 정도..
부루불라의 정체가 정확히 무엇이라고 정의 내리기는 어렵다. 그것은 요괴라고 하기에는 너무 의지가 없고, 현상으로만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그저 자연 현상이라고 넘기기에는 괴이로써의 특성이 없는 것은 아니다. 지금도 이것이 의지를 가진 요괴인지 아니면 그저 기이한 현상인지는 밝혀지지 않았다. 일반적으로 요괴는 인간을 통해 살아가는 힘을 얻기 때문에 인간 근처에 머문다. 하지만 부루불라는 인간이 있든 없는 발생한 자리에서 같은 행동을 반복한다. 때문에 부루불라를 단순히 현상이라고 하는 견해가 있는 것이다. 부루불라가 발생하는 원리는 명확하지 않다. 다만 날카로운 것에 긁힌 벽에 흠집이 남듯이 공기에 생긴 상처 같은 것이라는 설이 지배적이다. 드물게 주변의 소리와 공기가 뭉쳐지는 장소가 만들어지고, 여기..
여기는 또 어딜까? 처음 보지만 이상하게 익숙한 천장을 보는 게 몇 번 째일까. 그 이전에 난 누구일까? 안개가 낀 듯 머릿속이 뿌옇지만 곧 괜찮아질 거다. 이번에는 누가 된 것인지도 조금씩 생각날 거다. 어제까지는 50대 아줌마였다. 한 달 정도 전에 변해서 나름 열심히 살았다. 두 아이의 뒷바라지를 하면서 보험 일도 열심히 했고, 둘째의 생일을 챙겨준다고 일찍 집에 들어가다가...... 거기서 기억이 끊겼다. 어떻게 된 걸까. 생각해 보면 계속 이런 식이었다. 새로운 기억과 몸에 적응하여 충실히 살다 보면 어느 순간 다른 몸이다. 그 전에는 입시를 준비 중이던 10대 학생이었다. 엄마는 괜찮을까? 아빠도 걱정을 많이 할 텐데...... 또 그전에는 30대 회사원이었다. 그러고 보니 아내가 기다리고 있..
슬슬 여름이 찾아오는 시기가 되었다. 점점 높아지는 기온과 습도가 조금 쉽게 짜증 나게 하기도 했지만 그보다 기분을 안 좋게 하는 것은 곰팡이였다. "아, 이건 못 쓰겠네." 아동용 이불이 완전히 망가졌다. 동물들이 웃고 있어야 하는 자리는 시퍼렇게 물들었고, 어떤 게 사자고, 여우인지도 분간이 되지 않았다. M씨는 세탁기에서 꺼낸 이불을 집어던지며 한숨을 쉬었다. 혹시 살릴 수 있을까 해서 세탁기를 돌려보았지만 괴상하게 뭉개진 동물들의 웃음만 확인했을 뿐이다. 이 이불은 M씨의 아들이 좋아하는 애착 이불이었다. 겨울에 창고로 보낼 때도 그렇게 울고불고 난리였다. 이제 아주 망가져 버렸으니 얼마나 난리를 칠지 걱정이 앞섰다. 안 그래도 얼마 전부터 이불을 언제 꺼내냐고 매일 물어보고 있었는데 어떻게 이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