괴담 공작소

(괴담창고) 그날을 기억해 주세요

너구리군 2022. 4. 18. 17:40



비행기를 타고 제주도에 도착한 B는 피곤한 몸을 이끌고 숙소부터 갔다.
요즘 출장을 유난히 자주 다닌 탓인지 온몸이 찌뿌둥하니 컨디션이 좋지 않았다.
그나마 이번 출장은 장거리라고 업무 앞뒤로 하루의 여유를 줘서 쉴 시간은 충분했다.
다만 혼자라는 점, 그리고 경비로 처리할 수 있는 비용이 많지 않다는 점 때문에 여행 분위기를 마음껏 내기는 어려웠다.

그래도 제주도까지 왔는데 흑돼지든 뭐든 맛있는 것 정도는 먹고 싶은 욕심은 있었다.

결국 B가 선택한 것은 숙소를 저렴한 곳으로 잡고 그 돈을 식비에 보태는 것이었다.
편한 잠보다 좋은 밥을 선택한 것이다.

공항에서 회사 이름으로 빌린 렌터카를 타고 도착한 곳은 ‘ㅇㅇ장’이라는 여관이었다.
이래저래 낡기도 낡았고, 시설이라고는 싸구려 냉장고와 작은 TV 하나가 다인 곳이라 잠만 겨우 잘 수 있는 곳이었다.
그나마 난방이 잘 되는 게 다행이라면 다행이었다.
하지만 바다와 멀지 않고, 시내까지 교통도 좋은 편이라 B의 목적에는 꽤 잘 맞았다.

숙소에 적당히 짐을 푼 B는 일단 바닷가에 있는 식당을 갔다.
검색해서 찾아낸 식당은 맛집이라는 평가를 받기에는 조금 부족한 느낌이 있었지만 전망이 워낙 좋아 즐거운 식사를 할 수 있었다.

B는 기왕 전망을 즐기기로 한 김에 근처 카페도 갔다.
해변가는 아니라 관광객은 많지 않고 간간이 낚시꾼이 보이는 바닷가는 혼자 감상에 잠기기 좋았다.
쌓였던 피로가 확 풀리는 느낌에 B는 저녁 바다를 조금 거닐다가 숙소로 돌아와 잠들었다.

깊은 밤.
B는 TV의 잡음 소리에 잠이 깼다.
옆에 굴러다니는 맥주캔과 마른안주를 보고 자신이 숙소에서 맥주를 마시다 잠 들었다는 것을 기억해 냈다.
몽롱한 기분에 다시 자고 싶었지만 화장실을 가고 싶어져 어쩔 수 없이 일어났다.
방에 비해 조금 추운 화장실 공기에 조금 잠이 깨는 것 같았다.

볼일을 보고 텁텁한 입안을 찬물로 헹구고 나니 조금 더 정신이 또렷해졌다.

그리고 그 또렷해지는 감각 사이로 이상한 소리가 들렸다.

[치이이이….. 나요… 치익…… 날… 기억…… 치이이이익 칙 해…… 치직 칙칙……]

방에 불을 켜는 대신 조명 삼아 그냥 둔 TV의 잡음 사이로 말소리 같은 것이 섞였다.
B는 싸구려 여관이라 방송도 제대로 안 나오는 모양이라 생각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조금 으스스하다 생각했다.

화장실을 나온 B는 TV를 끄기 위해 리모컨을 찾았지만 이상하게 보이지 않았다.

[치이익 그날… 치칙 기억….. 치이익 치직 칙 그날……]

짜증이 난 B는 TV 전원을 직접 끄기 위해 TV 앞으로 갔다.
하지만 TV 전원은 고장 난 상태였다.
누가 라이타로 지지기라도 했는지 전원 버튼이 녹아 눌어붙어 있었다.

그러는 동안에 TV에는 이제 화면도 조금씩 나오고 있었다.

해가 저문 바닷가.
어둠이 깔린 그곳은 묘하게 B가 산책을 했던 곳을 떠올리게 했다.

기분이 이상해진 B는 전원을 뽑아버리기 위해 코드를 찾았다.

[치익 그날을… 칙… 기억하나요? 치이익… 그날…… 기억… 해요?...... 치직]

바닷가에는 한 여자가 고개를 숙이고 앉아 울고 있었다.
눈을 감은 채 끊임없이 ‘그날을 기억하냐’고 중얼거리는 여자.
감은 두 눈에서는 과장되게 눈물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분위기만 아니면 코미디라고 해도 좋을 정도로 많은 눈물이었다.

초조해진 B는 다급하게 손에 잡히는 모든 선을 뽑기 시작했다.

[그날을 기억…… 치익… 하냐고요…… 나……]

이상할 정도로 많은 선을 모두 뽑았지만 TV는 꺼지지 않았다.

TV 속의 여자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나는……]

여자가 B를 똑바로 쳐다보며 눈을 떴다.

[이렇게 기억하는데.]

그 눈은 텅 비어있었고, 그 빈 구멍에서 물이 줄줄 쏟아지고 있었다.

결국 B는 기절하고 말았다.



다음날 정신을 차린 B는 멍하니 자신의 손을 보았다.
B의 손에는 리모컨이 잡혀 있었다.
TV는 켜진 채 아침뉴스가 나오고 있었고, 코드는 하나도 뽑히지 않은 상태였다.
애초에 TV와 냉장고밖에 없어 코드도 달랑 두 개였다.

피로가 쌓여서 악몽이라도 꾼 건가 싶었다.

한숨을 내쉰 B는 아침을 챙길 생각도 못하고 주저 앉은 채 TV를 보았다.
뉴스에서는 자잘한 사건 사고가 나오고 있었다.

[오늘 아침 ㅇㅇ리 인근 바다에서 20대로 추정되는 여성의 시신이 떠올랐습니다.]

뉴스에는 B가 어제 걸었던 바닷가가 나오고 있었다.

심장이 쿵 내려앉는 느낌이었다.

[사망한 지 얼마 되지 않은 것으로 보이는 이 시신은 보존 상태가 좋으나 두 눈의 안구는 모두 사라진 상태였다고 합니다.]

소름이 쭉 돋았다.

[경찰은 이 사건에 대해……]

TV의 말소리가 제대로 들리지도 않았다.

[목격자에 따르면 사망한 여성이 근처 여관에 머물렀던 것으로……]
[주머니에 있던 유서에는 ‘그날 제주도의 바다를 기억하세요’라는 문구가……]

B는 도망치듯 짐을 싸서 여관을 나왔다.

다행히 그  후로 별다른 문제가 생기지는 않았지만 그후로 B는 어지간하면 여관을 숙소로 잡지 않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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